Database | 자료실

 

자료출처 : https://m.cafe.daum.net/gigocun/qiTU/404/?svc=cafeapp

 

 

 

잊혀진 대한제국의 소중한 사진자료

 

 

  우리의 마지막 황실 귀한자료임니다

 잘 간직하고 후세에 전합시다

 

서울대박물관이'마지막 황실, 잊혀진 대한제국' 특별 사진전을 개최했다.

 

 

4.jpg

 

'마지막 황실, 대한제국' 사진전.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다 

 

 

11.jpg

 

 

 

일본으로 떠나는 덕혜옹주(1925년3월28일 촬영)

 

 

7.jpg

 

고종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伊藤博文과 조동윤 남작(1919년2월9일 촬영)

 

 

 

 

9.jpg

 

 

 

 

삼전에 참배하기 위해 영친왕과 함녕전을나서는 고종의 모습 (1918년1월15일 촬영)

 

 

14.jpg

 

덕수궁 석조전 앞 기념촬영.

1918년 1월 23일 오후 2시경 영친왕의 귀국을

기념하여 촬영된 사진으로 당시 고종을 비롯한각계

 인사들을 모두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

 

이날 기념촬영에는 이왕직 중추원 인사들,

총독부 관료들과 일본 軍警 고위층들이

참가, 총 3장의 기념 사진을 찍었다.

당시 조선을 지배하던 일본 인물들의면면을 보여준다

 

 

3.jpg

 

 

 

도자기에 휘호하는 영친왕

 

 

17.jpg

 

사진기로 창경원 하마를 촬영 하는 영친왕

 

 

13.jpg

 

 

 

수업을 마친 덕혜옹주가 교문 을 나와 마차에 오르려 하는 모습을 찍었다.

일본풍의 교복 치마를 입고 머리에는 양식 모자를 쓴 다소곳이 고개숙인 모습이다.

뒤에는 한복을 입은 시종 이 겉옷을 들고 따르고 있다. (1925년 촬영)

 

 

8.jpg

 

고종의 막내딸로 비운의 일생을 보낸 덕혜옹주가 日出소학교에서 일본학생들과 함께일본어 수업을

받는 모습이다.  뒤에 교사들과 수행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업 광경을 연출한 것으로 보인다.1925년

3월강제유학을 떠나기 직전 찍은 사진인듯.정중앙에 있는 흰 얼굴의 앳된 소녀가 덕혜옹주다.

얼굴에 애잔한 기색이 감돈다. 아이들이 들고 있는 교과서에  쓰여진‘국어’란 명칭은 일본어를 뜻한다.

1925년 3 월께 일본으로 강제유학을 떠났다.(1925년)

 

 

5.jpg

 

 

 

군복차림의 영친왕이 1918년

1월25일 경성유치원을 방문한 모습. (1918년 1월25일 촬영) 

 

 

10.jpg

 

영친왕이 조선 방문을 마치고 당시 남대문역 (서울역)에서 도쿄행 열차를 타기 직전 모습.

연미복 입은 수행원들과 함께 거수경례하며 플랫폼을 걷고 있다.(1918년 1월26일)

 
 
15.jpg

 

1919년 2월 9일 고종 황제가 승하한 창덕궁함녕전에서 일본왕가 장례의식인 봉고제(장례를 하늘에 알리는 의식)가 열렸다.

함녕전에 차려진 일본 신사풍의 제단 앞에서황실유족과 일본 제관들이  의식을 치르는장면이다. 왼쪽 문 바로 옆에서 힐끗

카메라를보고 있는 인물이 당시 총독 하세가와다.

<서울대박물관 제공(2006/05/26 15:27]출처 : 인터넷 한겨레)>

 

 

 

 

16.jpg

 

이승만 대통령이 그의 저서 '독립정신'(1910)에서 명성황후로 지명한 사진이다.

 

 

48.jpg49.jpg

 

주한 이탈리아 공사 카를로 로제티의 '꼬레아꼬레아니'(1904), 우리나라에 왔던

미국 선교사호머 헐버트(1863~1949)의 '대한제국멸망사'(1906)등에 실린 사진이다.

- 호머 헐버트씨 는 1906년 발간된 `한국 견문기'138쪽에서 `궁녀'라고 소개

(왼쪽).(오른쪽)독일 출신 작가의 사진첩에서 나온 것.'시해된 왕비'라는 뜻의 독일어

(Die ErmodeteKonigin) 설명이 붙어 있고 대원군의 평상복사진과 배경이 같아 일부에서는

명성 황후로 추정 하기도 했다.그러나 이미 1890년대 초반 발간된 미국국립박물관 보고서,

영국 잡지화보 등에 '조선의 궁녀'라는 설명으로 실린 사실이 확인되었다.

 

 

12.jpg

 

위 왼쪽 사진 ; 고종, 순종, 오른쪽 ;독일어로 ‘Palastdame’(궁녀),

영어로 ‘ Attendant on The King of Korea'(조선 왕의 시종)로 기록됨.

아래 사진; 대원군, 오른쪽은 중국풍 복식 차림의 대원군

 

 

18.jpg

 

상중의 이건 연미복 입은 고종 황제

 

 

34.jpg

 

영녕전 참배 의식중인 영친왕

 

 

19.jpg

 

경성 일출심상 소학교 시절의 덕혜옹주

 

 

20.jpg

 

송별회장에 전시된 덕혜옹주의 작품으로, 자수와 서화에 남다른 소질이 있었다.

 

 

41.jpg

 

덕혜옹주와 선생, 동급생들의 기념사진

 

 

28.jpg

 

홍릉 입구의 홍살문 - 홍릉에 배치된 3조의 홍살문 중 하나로 현재 전하지 않는 문이다

 

 

35.jpg

 

융희황제(순종) 장례식 (국상),

 

인산에 참여 한나인들 -재궁의 봉안을 마치고 내려오는 모습

 

 

37.jpg

 

융희황제(순종) 장레식 (국상), 인산습의 광경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40.jpg

 

금곡으로 향하는 인산 행렬

 

 

29.jpg

 

창경궁 인정전

창경궁은 조선왕조 태종 연간에 지어진 이래 가장 오랫동안 국왕들이 기거하며 활동했던  궁궐이다.

이번 전시회에 나온 사진들은 1910년 일제에 의한 강제 병합 이후 1917년 내전 일대에 

화재가 발생하기 이전 창덕궁의 모습을 담고 있다

 

 

30.jpg

 

황실 가족사진- 고종을 중심으로 순종과 순정효황후,영친왕, 덕혜옹주를 담고 있는 이 사진은 1918년1월21일 촬영된 것이다.

사진은 덕수궁 석조전 내부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세부 장식까지 자세히 엿 볼 수 있다.

 

 

36.jpg

 

석조전 오찬에 나아가는 고종 - 가마에 탄고종이 영친왕 방문 기념

오찬회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42.jpg

 

배에서 내리는 영친왕이 이하계의 안내로 배에서 내리며 거수경례로 마중 나온 관민들에게 답하고 있다.

 

 

31.jpg

 

총독 관저 내부로 들어어가는 영친왕

영친 왕이 윤덕영 자작(오른쪽)과 총독부 관리들의 인사를 받으며 총독관저로 들어가고 있다.

 

 

38.jpg

 

남대문에 도착한 영친왕

1918년 1월13일 오후 9시경 남대문역에 도착한 영친왕이 2대 총독인 하세가와 요시미치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39.jpg

 

운현궁 양관

 

운현궁 내에 자리 잡은 양관 은 일본인이 설계 시공한건물로,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의

저택으로사용되었다. 그 후 의친왕의 차남인 덕성여자대학교평생교육원 사무처로 사용되고 있다.

 

 

32.jpg

 

덕수궁 석조전

 

대한제국기에 지어진 대표 적인 서양식 건물로 영국인 기사 하아딩(G.R.Harding)의 설계에

의해 1900년말 착공, 1910년 6월 완성되었다.

 

 

45.jpg

 

창덕궁 상궁들과 기모노 복장의 일본 여인

한국사진계 선각자인 백오 이해선(1905-1983)선생 탄신 100년기념으로 선생이 촬영한 사진작품

 

 

46.jpg

 

이방자 여사와 함께 받은 덕혜옹주의 생일상

구한말 황실의 모습을 보여주는 희귀 사진 발견.

최진연 대한사진예술가 협회 회장은 그동안 미공개 조선 황실 사진을 공개.

1962년 일 본에서 귀국한덕혜옹주가 생일을 맞아 이방자 여사와 함께촬영된 사진이다.

 

 

44.jpg

 

오열하는 궁녀들

 

조선 마지막 순종효황후 윤씨의 승하일 창덕궁 낙선재에서 황실의 궁녀들이 오열하고 있다

 

 

43.jpg

 

 

구한말 황족 한자리에

- 왼쪽부터 덕혜옹주, 이방자 여사, 윤황후, 순종, 영친왕 ,영친왕의 아들 이진, 이진을 안고 있는 사무관

 

 

21.jpg

 

대원군의 62세 생일 기념

- 이 사진은 1882 년 8월 한성관무처에서 62세 생일기념으로 찍은 사진

 

 

22.jpg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 처음 마주친 것은 DVD 물로만들어진 조선황실의 기록이었다.

아는 것은 아는대로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실은 모르는 것이 더 많지만..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15.jpg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

- "일명을 겨우 보존한 짐은 병합 인준의 사건을 파기하기 위하여 조칙 하노니 지난날의 병합 인준은

 

강린(일본)이 역신의 무리(이완용 등)와 더불어 제멋대로 만들어선포 한 것이요, 다 나의 한 바가 아니라.

 오직 나를 유폐하고 나를 협제하여

나로 하여금 명백히말을 할 수 없게 한 것으로 내가 한 것이 아니니 고금에 어찌이런 도리가 있으리오.

나 구차히 살며 죽지 않은 지가 지금에 17년이라.

종사의 죄인이 되고 2천만 생민의 죄인이 되었으니,

한 목숨이 꺼지지 않는 한 잠시도 잊을 수 없는지라,

유인에곤하여 말할 자유가 없이 금일에까지 이르렀으니…."

 

 

25.jpg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

 

- 1926년 4 월25일(음3월14일) 오전 6시 15분,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純宗)은

피맺힌 한 을 토하는유언을 남기며 창덕궁 대조전에서 53세로 숨을 거뒀다.

 

고종에게 전위 받은지 20년, 일제에 국권을 피탈 당하고17년의 세월이 흐른 때였다 .

1907년(광무11년) 7월19일(음6월10일)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은 일제의 압박에 의해 물러난다.

 

순종은 고종을 대신해 대리청정을 하다가 8월27일(음7월19일)경운궁(덕수궁)에서 조선 27대 마지막 황제로 즉위한다

 

 

 

23.jpg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

일제는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1906년 2월) 통감을 설치,국정을 간섭하였다.

 

 

 

27.jpg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

 

-순종의 인산일 일어난 6·10만세 운동 고종과 순종은 여러 차례 독살설에 휘말린다

 

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에 태어난 순종은 1875년 왕세자로 책봉된다.

고종이 숨을 거둔 1919년, 일제에 의해 독살 당했다는 소문에 민심이 흉흉해지고 

3·1운동을 촉발시킨 원인이 됐다.

 

 

 

 

 

24.jpg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

 

-황제는 가고 무덤가는 적막하다

 

6월 11일 해시(亥時·21~23시)에 순종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한을 풀지 못하고 유릉에 순명효황후와 합장됐다.

조선의 황제 순종은 국권을 빼앗긴 울분에 눈을 감지 못했으리라순종의 계비

순정효황후(1894~1966) 윤씨는 1906년 황태자비로 책봉되고 1907년 순종의 즉위로

조선 최후의 황후가 된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10 갓 쓰고 한복 입은 조선 외교관들 file 2022.06.09
» 잊혀진 대한제국의 소중한 사진자료 file 2022.06.09
8 1893년 시카고에 나타난 대조선 file 2022.06.09
7 샌프란시스코 사적지 지도 file 2019.03.05
6 2019년 3월 독립운동가 손병희 file 2019.03.05
5 2019년 2월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1892. 6. 18. ~ 1944. 3. 13.] file 2019.02.23
4 2019년 1월 독립운동가 유관순 선생 file 2019.02.23
3 73주년 광복절 회장 경축사 file 2019.02.23
2 윤행자 회장 임명장 file 2019.02.23
1 독립선언서 file 2019.02.23
Board Pagination Prev 1 Next
/ 1